[컬럼]윤동주, 장준하, 문익환, 정일권 학우의 흑백사진과 오래된 칼럼 한 편
기자 : 관리자 날짜 : 2016-06-12 (일) 20:49

윤동주, 장준하, 문익환, 정일권 학우의 흑백사진과 오래된 칼럼 한 편


이우송 논설위원(살림문화재단 이사장, 사제)    
 
흑백영화 ‘동주’에서는 주로 송몽규와 윤동주의 생애와 삶에 촛점을 맞추고 문익환도 영화 초반에 함께 교내 문예지를 만드는 장면이 잠시 등장한다. 정일권(1917), 윤동주(1917), 그리고 6개월의 시차를 두고 태어난 문익환(1918), 장준하(1918) 이 네 분은 자료사진에서 보듯이 만주 용정의 광명중학을 함께 다니며 호연지기를 길렀던 학우였다. 송몽규, 윤동주, 문익환, 장준하는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유학을 했고 1940년 초반 불리해진 전세의 일제는 조선유학생도 징집하기 시작한다.
일제강점기 젊은 나이에 옥에서 의문사한 송몽규와 윤동주, 군사독재와 맞서다 고인이 된 장준하의 의문사 후에 친구들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살아오다 50대 후반에 '늦봄'이라 이름을 짓고 민주화운동을 시작하신 문익환의 詩 ‘동주야’에서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 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 달 먼저 났지만 나한텐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이렇게 구질구질 늙어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중략)고 말합니다.


역사는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진보하리라던 희망 마져 져 버리게 되는 작금의 현실을 보면서 오래된 낡고 꾸깃꾸깃한 칼럼 한편을 다시금 꺼내게 된다. 예수를 선생으로, 주군으로 모시던 문익환의 장례식이 있던 날, 생방송 칼럼을 읽어내려 가면서 눈시울을 적셨던 당시를 회상하면 느낌이 새롭다. 정부도 대통령도 없고, 교회도 성직자도 신자도 돈도 집도 명예도 없이, 오직 '영혼의 道'만으로 본인이 편한 자기자리를 찾아가신 앞 세상의  문익환이 부럽다. 어두웠던 민족의 격변기에 한 해의 시차를 두고 태어나서 옳던 그르던 백성 앞에 지도자로 우뚝 섰던 정일권과 문익환이 한 날 세상을 떠났다. 고인이 된 두 분은 숱한 역사의 질곡을 거스르며 가치를 달리하는 대조적인 삶을 살다 우연히 같은 날 세상을 떠난 것인데 사가들은 이런 사건을 후일에 어떻게 기록할까 생각에 잠긴다.
  1917년에 태어나 37년 봉천군관학교와 40년 일본육사를 55기로 졸업 후 만주군 장교를 지냈고 해방 이후 조선국방경비대를 거쳐 1950년 서른셋의 나이에 5대 육군창모총장과 국군총사령관을 지낸 정일권이 살아온 삶 여정은 영락없이 박정희의 아바타로 보인다. 그는 군사 구테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에 의해 3공화국의 국무통리로 임명된 후 한일협정 비준 삼선개헌 등 숱한 역사의 고비 고비에서 박정희와 함께 권좌를 누렸던 숭악한 사람이다.
 
  그 시절 문익환은 교사와 목회자로서 그리고 신학자로 살아 왔다. 군사독재정권의 칼날이 번득일 때는 민주구국선언으로 옥살이를 시작했다. 정일권이 신군부정권 이후 노년시절까지 자유총연맹총재 등 권력의 주변을 맴돌면서 해방 후 현대사를 풍미하고 있을 때 문익환은 부러진 민족사를 끌어안고 감옥을 넘나들며 통일을 노래했다. 그러고 보면 정일권은 확실히 풍운아였다. 장례식까지 집권여당 대표의 보위를 받으며 성대히 떠나는 모습이 개인에게는 영광이 될지 모르나 문민시대로 장식된 현대사에는 걸맞지는 않아 보였다. 한 평생 조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다 스려져 가신 문익환. 우리민족의 가장 큰 아픔이 외세에 의한 분단이며 우리가 뜻을 모아 분단을 극복해 보자시며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악법인 보안법을 손수 어기기로 하신 문익환.

평양으로 떠나시기 전 詩를 통해 ‘서울역에 나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달라고 소년처럼 억지를 쓰시던 이 시대의 시인 문익환은 반도의 빗장을 풀겠다고 북으로 떠나셨다. 십자가를 지고 민족의 허리에 감긴 철조망을 온몸으로 걷어내시다 스러져가신 그는 분명 통일의 그날까지 우리와 함께 할 민족의 혼이다. 생전에 써놓은 '통일 염원의 시'에서 ‘역사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그분은 말처럼 살다 가셨다.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 김영삼 대통령을 대신해서 왔다는 청와대 김정남 수석의 빈소 방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금 우리 앞에는 통일에 최대의 장애물인 국가보안법이 엄존해 있다. 앞에 영면을 취하고 계신 문익환 목사는 가석방 상태에서 사면복권도 안된 채 입관되어 있었다. 현행법상 국사범의 시신 앞에 대통령이 기릴 것이 무엇일까.

정작 기려야 할 과제가 있다면 통일운동의 우두머리 하나가 사라졌다는 안도의 한숨이 아니라 수천수만의 통일꾼 문익환의 부활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내일은 영결식이 있는 날이다. 이제 온 국민은 진정한 민주화와 통일의 날을 준비하면서 예언자 문익환의 영혼이 하느님의 은총가운데 평안히 쉬시기를 기원할 때이다. 시인 문익환은  세상을  떠나시면서 젊은 청년에게 안구기증을 통해 몸의 한 부분을 남기고 가셨다. 시인 문익환은 남겨놓은 눈을 통해  이 땅의 민족통일을 지켜볼 것이다.

[20여 년 전, 1995년 1월 21일자 문익환 목사께서 이승을 떠나 영면에 드시던 장례식 전날의 CBS생방송 칼럼을 다시 정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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